작품 소개
초판발행 2024.04.25
서 문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기 시작할 무렵 국내 국제법 교과서에는 한국 사례가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의 법령이나 판례에 관한 언급조차 없었다. 국내 필자의 저서임에도 속 내용은 온통 미국, 영국 또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경험한 사건, 판례, 그들의 법령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고 세부 연구서 또한 별달리 없었다. 국제법이라는 특성상 국제적으로 저명한 해외 사례가 주로 제시되고 분석되는 일은 당연했지만 대한민국이 경험한 사건으로 국제법적 시각에서 다룰 대상이 이렇게 없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국제법이란 우리와는 관계없는 타자(他者)들만의 법질서인가? 남의 나라 이야기만 들으며 공부하다 보니 필자에게 국제법은 현실의 대지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허공 위에 떠도는 소리 같았다. 국제법은 우리에게 “국제법도 법이냐?”는 조소성(嘲笑性) 질문 속 그런 존재에 불과한가? 국내 법조문 해석에 너무 몰두하지 말고, 좀 다른 법학을 공부하고 싶어 택한 국제법이었는데 내가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하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석사과정 초년도에 우연히 접한 미국 L. Henkin의 ?Foreign Affairs and the U.S. Constitution?과 ?How Nations Behave(2nd)?를 읽으며 색다른 흥분을 느꼈다. 미국 중심의 이야기였지만 그 책 속에서는 국제법이 살아 움직이며 미국 외교와 헌법을 분석하고 있었다. 이제는 오래되어 책 내용은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40여 년 전 필자가 느꼈던 짜릿한 생동감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미국과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야 큰 차이가 있지만, 우리의 역사와 경험을 국제법적으로 설명해 주면 국제법이 훨씬 현실감 있게 다가올 듯싶었다. 국제법이 한국의 대외적 주장을 뒷받침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분석하고 정리해 줄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구자의 길 초반부에 가졌던 이런 생각이 교수 생활 내내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늘날 어떤 나라도 세상에서 완전 고립되어 홀로 존재할 수 없다. 19세기 중반 조선은 세계사의 최변방 오지였지만, 1980년대에 들어설 무렵 대한민국의 무역 규모가 이미 세계 20위권에 들었다. 한류라는 소리가 나오기 훨씬 전 이미 1977년 6월 6일자 뉴스위크는 “The Koreans Are Coming”이란 표지 제목과 함께 한국인들이 소형 라디오, 계산기, 철봉, 와이셔츠, 가발, 수산물 그리고 선박까지 들고 지구 곳곳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반세기 전에도 한국은 이미 우리 자신의 인식 이상으로 국제사회에 크게 노출되고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국가였다. 우리 근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한반도는 본의 아니게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을 필두로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국제전을 겪었다. 대한제국이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은 조약이라는 국제법으로 포장되어 진행되었다. 제2차 대전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의 개입으로 탄생한 첫 번째 독립 정부 사례였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미군정을 거쳐 정부 수립, 6?25 전쟁, 월남전 참전, 한일 국교 정상화, 대외무역 진흥을 통한 경제발전 등등 한국은 지난 세기 다른 어떤 나라 못지않게 다양한 국제법 경험을 겪었다. 적지 않은 고통과 혼란 속에서도 다른 나라들은 경험하지 못한 독특한 국제법적 문제에 자주 부딪쳤다. 결국 우리의 국제법 문제를 우리 스스로 찾고 분석하는 일을 게을리했을 뿐, 우리 역사를 국제법을 통해 설명해야 할 소재는 무궁무진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법적 설명이 충실히 되어야만 왜 우리에게 국제법이 필요하고, 미래를 위해 어떠한 대비를 해야 할지 윤곽이 분명해질 듯싶었다. 국제법 연구자로서 필자부터 이러한 작업의 일부라도 담당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책자는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우리 역사 중 우선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을 연구 대상으로 잡았다.
흔히 정부, 영토, 인구를 국가의 3요소라고 말한다. 이 책은 대한민국이 정부, 영토, 인구를 어떻게 구성하고 출범했는가에 대한 국제법 측면의 분석을 주목적으로 한다. 더불어 대한민국 출범 당시의 법질서와 외교관계에 관한 설명도 덧붙인다. 목차를 살펴보면 전반적인 내용 자체는 생소하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사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과정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기본적인 상식을 갖고 있다. 본 책자는 국제법의 시각에서 이를 처음으로 종합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작은 책자지만 필자로서는 나름 오랜 관심과 작업의 결과물이다. 참고문헌 속에 이 책 집필에 직간접으로 바탕이 되었던 필자의 과거 논문 목록을 별도로 분류해 첨부했다.
사실 약간은 막연하던 관심을 이 책자와 같은 결과물로 집중하게 된 계기는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 지원이었다. 정년을 딱 3년 앞둔 시기에 3년을 연구기간으로 삼아 저술지원 신청을 했더니 덜컥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왕에 해 놓은 작업도 있어서 3년이면 얼추 결과물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나름 이를 정년퇴임 기념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예상외의 제 잡사가 많아 이 일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다. 3년이 그냥 훌쩍 지났다. 정년 후에도 작업이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다른 할 일이 늘 쏟아져 들어 왔고, 생활은 의외로 분주했다. 작업을 계속했으나, 온전히 집중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결국 미루고 미루다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어 현재의 상태로 결과물을 제출하고 작업을 일단 마무리하기로 했다. ‘일단’이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대한민국 수립과 국제법?이란 제하에서 취급하고 싶은 주제가 좀 더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군정 당국과 대한민국 간의 권리·의무 승계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개인적으로 후속 연구를 계속할 계획이나, 수십 년 가까이 가슴에 품고 살던 숙제 하나를 마무리하게 되어 우선은 후련하다.
연구재단 시한에 쫒기다 보니 본의 아니게 박영사 관계자들에게 폐를 많이 끼치게 되었다. 늦은 원고를 신속히 책자로 탈바꿈시켜 준 편집부 김선민 이사, 상업성 없는 책자의 출판을 너그럽게 수락해 준 조성호 이사,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게 제작에 힘을 보태준 박영사 여러 직원들께 지면을 통해 감사를 표한다. 아울러 이 책의 독자에게 아직도 대한민국의 역사와 경험을 국제법적으로 분석해야 할 소재는 무궁무진하니 관심 있는 분의 동참을 기대한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2024년 4월
정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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