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것이 약 8세기에 달하는데, 왜 언어가 아랍어로 바뀌지 않은 것일까? 스페인어에는 얼마나 많은 아랍어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일까? 재정복 전쟁 과정에서 형성된 초기 로망스어와 카스티야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현재 쓰이고 있는 스페인어는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일까? 이 책에서는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 즉 스페인어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 속으로
제5장
이슬람 치하의 이베리아반도와 언어
5.1. 시대 상황
5.1.1. 제1기: 정복기(711-756)
5.1.1.1. 이슬람 세력의 반도 진출
7세기 초, 아라비아의 황량한 사막에서 통일된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부족 단위로 흩어져 살고 있던 아랍인들에게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나타났다. 출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으나 대개 570년경으로 추정되며, 610년 메카의 히라 동굴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했다고 전한다. 당시 아라비아에는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과 가톨릭교들도 소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부족은 다신교를 믿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다.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포교에 전념하다가 622년 여름 타 부족들의 박해를 피해 북쪽의 Yath rib이라는 도시로 피신했다. 이를 헤지라, 즉 ‘성천(聖遷)’이라고 한다. 이후 이 도시는 이슬람 세계의 ‘중요한 도시’라는 의미에서 이름이 Medina로 바뀌었다. 630년 자신을 따르는 교도들을 이끌고 메카로 진격해 무혈점령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교세 확장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마호메트는 생전에 아라비아반도를 정치, 종교적으로 통합했으며, 632년 메디나에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칼리프들은 세력을 더욱 확장해,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북쪽으로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서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진출했다(642년). 이후 동쪽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651년) 중앙아시아에 진출해 중국의 당(唐)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으며, 북쪽에서는 거대한 비잔틴 제국과 국경을 맞대게 됨으로써 더 이상의 팽창이 저지되었다.
서쪽, 즉 북아프리카 쪽에서는 상황이 좀 더 양호한 편이었다. 사막의 전사들인 베두인족을 앞세워 651년에 트리폴리를 정복했다. 당시 북아프리카 일대는 반달족의 약탈과 비잔틴 제국의 수탈로 경제적으로 매우 피폐해져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여서 이슬람 정복자들에게 좋은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680년경에는 대서양과 맞닿은 모로코와 모리타니아까지 진출했다. 이 지역 또한 아라비아반도만큼이나 혹독한 사막 지대였다. 그런데 지중해 건너 이베리아반도, 손에 잡힐 듯이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시에라 네바다산맥은 푸른 숲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넘쳐흐르는 그야말로 지상 낙원이었다. 3천 미터가 넘는 고봉에는 늦봄까지도 흰 눈이 덮여 있고 사시사철 푸른 숲이 우거져 있었다. 사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황홀한 광경이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물 한 모금 얻기 힘든 황량한 모래벌판에서만 살던 그들에겐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꿈에 그리던 지상 낙원이 바로 저 바다 건너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곳은 바로 과거 429년에 반달족이 건너온 곳이었다. 이번에는 이슬람교도들이 그 길을 거꾸로 되짚어가려 하고 있었다. 해협의 최단 거리가 14km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상황만 허락되면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는 곳이었다.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차에 이베리아반도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710년 로드리고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서고트 왕국이 극심한 내분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위티사 일파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더 없는 낭보가 아닐 수 없었다.
710년 7월, 탕헤르의 총독이던 타릭 이븐 지야드는 반도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부하인 Tarif를 정찰대로 파견했다. 타리프는 약 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은밀하게 반도에 잠입해 서고트군의 방어 태세를 파악했다. 이 Tarif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온 지명이 Tarifa이다. Al Yazira Tarif ‘타리프의 섬’에서 나온 말이다.
서고트군의 방비가 허술한 것을 파악한 타릭은 이듬해, 즉 711년 4월 드디어 군대를 일으켰다. 북아프리카 지역 총사령관인 무사 이븐 누사 이르의 지시에 따라 약 7천 명의 베레베르 병사들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해협을 건넜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었고, 또 그동안 사막에서 크고 작은 전투에 익숙해 있던 이슬람군에게 좁은 해협을 건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반도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북아프리카에서 보면 현재 Gibraltar ‘히브랄타르’라 불리는 곳에는 거대한 바위산이 우뚝 솟아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이 산을 ‘타릭의 산’이 라는 의미에서 Yabal T?riq이라고 불렀다. Gibraltar는 이것이 변한 것이다. Gibr-는 아랍어 Yabal이 변한 것으로 ‘산, 바위’라는 뜻이다. 히브랄타르 서쪽에 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 바라보고 있는 도시가 Algeciras이다. 이곳 역시 711년 이슬람교도들이 상륙한 곳이다. 어 원은 Al Yazira al Jadr?’ ‘isla verde’라고 한다. 이것이 변해 Algeciras가 된 것이다. 이는 인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녹색의 섬’이라는 아름다운 경치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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