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19세기 후반 TV와 영화의 등장과 함께 이미지가 인류에게 놀라운 신선함으로 등장한지도 어느덧 두 세기가 지났다. 하지만 이 시대에 디지털이미지는 너무도 대중에게 익숙해진 상태라서 이제 지구촌 시민들은 더 이상 이미지에 그 어떤 놀라움도 느끼지 못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파되고 있는 작금의 디지털이미지는 놀라움 대신 표현 방식과 재미난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유혹할 뿐이다. 즉, 대중을 얼마나 더 직접적으로 자극시킬 수 있는가라는 기술적 문제가 이미지들을 어떻게 배치하여 소비 대중을 매혹시킬 수 있는가라는 자본의 전략과 은밀하게 결속돼 이름하여 ‘이미지’는 오늘날 날-욕망의 자극제로 활용되고 있다.
본 저서는 이상에서 제기한 필자의 문제의식, 화두를 해소할 목적으로 집필된 것으로 철학적인 측면에서 이미지 범람 시대를 진단해보고, 이미지의 본래적 지위를 재고할 필요를 담은 책이다. 이데아와 실재, 실재와 이미지, 이미지와 시뮬라크르의 관계를 정의해보고 현대의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 실재에 대한 재물음을 통해 실재 세계가 철학의, 모든 이미지 관련 담론의 귀착지가 되어야 한다는 사유여행을 함께 알아본다.
책을 출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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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TV와 영화의 등장과 함께 이미지가 인류에게 놀라운 신선함으로 등장한지도 어느덧 두 세기가 지났다. 하지만 이 시대에 디지털이미지는 너무도 대중에게 익숙해진 상태라서 이제 지구촌 시민들은 더 이상 이미지에 그 어떤 놀라움도 느끼지 못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파되고 있는 작금의 디지털이미지는 놀라움 대신 자유로운 표현 방식과 흥미로운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유혹할 뿐이다. 즉 대중을 얼마나 더 직접적으로 자극시킬 수 있는가라는 기술적 문제가 이미지들을 어떻게 배치하여 소비 대중을 매혹시킬 수 있는가라는 자본의 전략과 은밀하게 결속돼 이름 하여 ‘이미지’는 오늘날 날-욕망의 자극제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현실 앞에서 ‘이미지의 시대’라는 정의는 다소 진부해 보일 수도 있다. 이미지는 현 인류의 삶 전반과 구분될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고, 마치 공기나 바람처럼 거의 매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이렇게 우리의 삶의 영역을 둘러싸고 깊숙하게 침투하였다는 점을 전제로 해서 이미지를 단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매개이자 소비의 대상으로만 이해해야 할까? 만약 이미지를 그러한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면, 이미지는 기술과 자본 그리고 욕망의 삼각형이 생산하는 전략적 담론의 예속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욕망의 표피를 가볍게 건드린 후에 휘발되어버리는 이미지, 이미지를 그렇게 소비하도록 만드는 기술적으로 조작된 매개, 그리고 이의 소비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의 승리!?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본에 의해 아주 세심하게 고안된 전략이 성공하느냐 혹은 실패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전략은 성공하면 원래 계획한 대로 반복되거나 확장될 것이고, 실패하면 수정되거나 새롭게 고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전략의 실패는 있을 수 있어도 자본의 전체적인 전략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전략에서 늘 전위대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미지가 문제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미지는 이렇게 늘 부차적인 것에 그치는가? 이미지에 다른 가능성, 역할은 없는 것인가? 왜 이미지는 자신의 존재 항명을 하지 않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을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의 영역에서 이미지를 둘러싼 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떠올려보도록 하자. 철학에서 일종의 고유명사로 이해되기도 하는 ‘플라톤의 이데아의 모델’은 이미지의 위상(位相)을 언급·선고한 최초의 철학적 규정이다. 질베르 뒤랑에 따르면 철학자들에게 이미지란 근현대를 경과하면서도 여전히 플라톤 방식의 ‘환영(phantasma)’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현실이다. 그 정도로 이미지란 그 본래적 기능과 역할이 폄훼되었고, 철학자들 역시 이미지를 ‘골치 아픈 대상’으로 여겼다. 이미지는 감각을 통해 정신에 포착되지만 이내 사라져버리는 애매한 존재적 성격과 상상력이라는 정신의 기능에 의해 자유롭게 생산되지만 그 스스로는 결코 대상과의 일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다. 불변하는 참된 존재와 진리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철학자들에게 이미지는 늘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구체적 언급을 꺼리는 예가 많았다. 그러니까 철학자들은 이미지를 존재의 위계 하부에 위치시키거나 이성의 개입을 통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비록 철학자들은 이미지를 여러 형식과 내용으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다는 이유로 존재의 주변부 혹은 인식의 오류라는 영역에 강제한 셈이며, 이미지는 이렇듯 존재의 위계와 인식의 질서를 철학함의 본질로 여긴 교조주의적 이성에 의해 아고라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의 시대’라는 다소 철지난 정의와 함께 종종 언급되곤 하는 ‘시뮬라크르’는 일견 존재의 위계에서 유폐되고 인식의 질서에 의해 추방되었던 이미지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한 철학의 새로운 기폭제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판 이미지들은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 존재나 진리에 다가서기보다 오히려 주변부성, 오류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기술과 자본 그리고 욕망의 삼각형에 의해 조작되고 배치되어 유포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철학자들이 부과했던 위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극과 유희의 매개가 되어버린 이미지는 오히려 철학자들의 지적 노력의 대상이 되었던 과거보다 더욱 저열한 것으로 변질된 것인지 모르겠다. 상품과 하나를 이루고 삶 전체에 너무나 밀착해버린 이미지는 이제 진지한 숙고의 주제조차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처럼 이데아와 시뮬라크르는 철학사에서 이미지가 부여받았던 위상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미지에 대한 두 극단적인 시각을 대표한다. 하지만 이 두 시각은 이미지를 동일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이미지에 부과된 ‘환영’이라는 규정은 이미지의 시대라고 불리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데아와 시뮬라크르 간의 차이란 고작 이미지의 생산력을 지성과 이성의 질서에 복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기술과 자본 그리고 욕망의 삼각형 속에 가둘 것인지에 따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근 10여 년간 이미지에 대해 다루었던 논문들을 하나의 저서로 묶기 위해 선택한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라는 제목은 그저 이미지의 위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려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를 바라보는 두 극단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논증하고 호소하기 위한 것 역시 아니다. 오히려 본 저서에서는 이 두 극단을 철학적으로 검토하면서 이들에게 공유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가시화되지 않은 규정이 있다는 것을 밝혀보려고 애썼다. 그러한 노력 그리고 이를 통해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규정 가능성을 탐색해보려는 필자의 무의식은 거의 모든 장에 걸쳐 은밀하게 표출되어 있을 수도 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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