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초판발행 2024.09.28
옮긴이 후기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법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독일 법철학을 공부한다는 뜻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초반에 법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내게 부과된 첫 번째 과제는 독일어 공부였고, 그다음 과제는 독일 법철학을 대표하는 책을 손에 넣는 일이었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이제는 희미한 기억의 건너편으로 사라졌지만, 어찌어찌 법철학과 관련된 두 권의 ‘원서’가 내 손에 들어왔는데, 하나는 라드브루흐의 『법철학』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 책 『현대 법철학과 법이론 입문』 제3판이었다. 기억이 어차피 과거에 대한 현재의 편집과 재구성이라면, 전자는 20세기 독일 법철학을 대표하는 책이라는 점 때문에 그리고 후자는 그 시점에서 법철학의 최신 경향을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누군가에 의해―선택된 것 같다. ‘입문’이라는 단어 때문에 이 책을 먼저 읽어보려고 했지만, 초보자로서 당연히 많은 좌절을 겪었고 책 제목에 있는 ‘법이론’이라는 용어가 1970년대부터 부상한 독자적인 분과라는 사실 역시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1984년에 이 책의 기획자인 아르투어 카우프만이 고려대학교 대학원 건물에서 강연할 때 이 책에 사인을 받았던 일, 나중에 대학원에 입학할 때부터 독일 유학 시절에 이르기까지 내 머리에 ‘카우프만/하세머’라는 별칭으로 입력된 이 책의 신판이 나오면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해 즉시 내 서가에 추가했던 일 등등 이 책의 역사와 나의 개인사는 어떤 식으로든 맞물리면서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인지 독일 법철학 전문서이든 교과서이든 현재 가장 높은 판수를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의―현시점에서의 최신판인―제9판을 번역해 출간하면서 나는 다수의 저자가 참여해 여러 주제를 다루는 이 책의 형식에 빗대어 마치 법철학과 관련된 내 개인사의 앤솔로지(Anthologie)를 대하는 것 같은 묘한 착각에 빠져든다. 특히 이제는 다원성과 다양성을 지녔기에 더는 중심부를 가늠할 수 없고, 조금 비딱하게 보자면 파편화(Fragmentierung)를 겪는 것 같은 우리 법철학의 현재를 생각할 때 이 책은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본채가 압도하던 아련한 과거에 대한 섣부른 오마주(Hommage)를 갖게 만들기도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고 책의 맨 앞에 나와 있는 세 개의 ‘서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초판이 출간된 1976년부터 주제, 필진 그리고 엮은이가 계속 조금씩 변화를 겪었다. 물론 초판의 기획자인 카우프만의 관점에서 주제들이 선택되고 필진 역시 대부분 카우프만의 제자들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카우프만 학파’의 집단 창작품이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그리고 엮은이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에 속한다. 여기에 번역 출간하는 제9판(2016년)의 서막은 법철학의 학문적 정체성, 법철학과 법이론의 관계 그리고 법률의 해석과 적용에 집중된 통상의 법학에서 법철학과 법이론이 지닌 의미에 관한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기는 글이 장식한다. 카우프만의 이 글은 1976년의 초판부터 실렸고, ‘입문’이라는 책의 성격에 가장 잘 부합하는 ‘서론’에 해당한다. 뒤이어 등장하는 「법철학의 문제사」는 흔히 ‘법사상사’ 또는 ‘법철학사’로 불리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약 2000년에 걸친 역사를 개관하기 때문에 별도의 단행본으로 출간해도 무방할 만큼 책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더 나아가 이 글에는 마이스터 카우프만의 풍모가 그대로 드러나고 그가 수용한 철학적 해석학(Hermeneutik)이 법률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법을 넘어 법의 해석학적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이해로서 법철학의 역사와 현재의 논의에까지 녹아들어 있다. 물론 역사적 개관이 어쩔 수 없이 부딪히게 되는 단순화의 한계가 눈에 띄고, 또 제9판부터 공저자로서 참고문헌의 업데이트와 오류의 수정을 담당한 폰 데어 포르텐이 글의 마지막에 추가한 자신의 법철학(2.6)이 생뚱맞게 읽힌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 「문제사」는 법철학과 법이론의 역사적 토대를 개관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현재의 논의 상황을 명확하게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책 전체를 대표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서론과 역사적 토대를 뒤로하면 이제부터 법철학과 법이론의 핵심주제들이 등장한다. 법철학의 고전적 주제인 ‘자연법(3)’과 ‘법과 도덕(4)’은 카우프만 제자 그룹의 좌장격인 엘샤이트가 맡았다. 엘샤이트는 존재와 당위의 관계에 관한 걸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썼지만, 학계에 남지 않고 평생 판사로서 실무에서 활동했다. 그래서인지 이 두 가지 극히 이론적인 주제를 현실과의 관련성 속에서 서술하려는 의도를 여기저기에서 확인할 수 있고, 이론적 완성도 역시 상당히 높긴 하지만, 난이도의 측면에서는 입문에 어울리는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역사철학이나 사회학과의 연결 가능성을 염두에 둔 서술은 입문서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다만 일반 철학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두 주제를 법학적 법철학에서는 어떻게 다루는지에 관심이 있는 독자나 기존의 논의를 심화할 필요를 느끼는 독자에게는 얼마든지 나침반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5-9는 좁은 의미의 법이론에 해당하는 글들이다. 즉 이미 19세기부터 학파논쟁의 대상이었던 주제인 법률과 판결 또는 입법과 사법의 관계를 법전편찬을 배경으로 예리하게 분석한 하세머의 글(5), 「법학적 해석학(6)」, 「법논리학(7)」, 「규범이론(8)」 등 역사적 연속성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논의가 전개된 법이론 주제 그리고 1970년대부터 법이론 논의의 한 축을 차지한 법적 논증이론(9)이 등장한다. 각 주제가 지닌 비중을 명확하게 확정할 수는 없지만, 가다머의 해석학 철학의 영향권 속에서 새롭게 발전한 법학적 해석학은 상대적으로 너무 장황하게 서술된 것에 반해, 역사적으로든 내용의 측면에서든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규범이론은 너무 단면적으로 서술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이 다섯 편의 글이 주제에 관한 흥미를 유발하거나 이미 가진 관심을 확대하기에 얼마든지 제 몫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독일어 원문에는 「법적 논증이론」 다음에 요헨 슈나이더(Jochen Schneider)가 집필한 「법적 결정이론(Theorie juristischen Entscheidens)」이 있다. 내 판단으로는 제9판에 실린 글 가운데 가장 난삽하고 번역기술의 측면에서도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우리 법철학의 논의와 연결될 가능성도 희박해 이 번역서에 함께 싣지 않는 과감함을 발휘했다. 독일에서 내년쯤 출간될 제10판에서도 이 글은 배제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법학 자체에 대한 성찰이론(Reflexionstheorie)에 해당하는 「법학의 학문이론(10)」과 「법경제학(11)」은 법학의 학문적 위상이나 법학보다 현실에서 훨씬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제학적 사고와의 관련성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독일 법철학에서는 학문이론이 더 주목을 받지만, 국제적 차원에서는 법경제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11이 지나치게 짧아 아쉬움이 남는다.
끝으로 최신의 법철학적 경향들을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의료윤리, 생명윤리 그리고 법(12)」, 「신경과학과 법(13)」, 「법의 절차화(14)」 등 세 편의 글이 실렸다. 제9판이 출간된 2016년의 시점을 고려하면 당시에는 시의성이 높은 주제들이었고, 지금도 이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지만 그사이 시의성이 조금은 떨어진 느낌이다. 지금은 아마도 ‘인공지능과 법’과 같은 주제가 시의성이 높은 주제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12와 14를 읽기 위해서는 독일 실정법, 특히 ‘특별형법’에 관한 사전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자주 있는데, 해당하는 법조문을 번역해 추가하기보다는 번역문 자체로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만 원문을 우회해 번역한 때가 자주 있었음을 밝혀 둔다.
이렇게 14편의 글로 채워진 이 책은 주제의 측면에서 고전과 신규의 조합이기도 하고, 법철학적 논의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는 논의의 장이기도 하다. 또 이제는 희미해진 ‘학파’가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한 학자가 그 이전 세대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을 자신의 다음 세대에 물려주면서도 그 전통의 물길이 반복과 고수의 물길이 아니라 사방으로 흘러 나중에는 그 연원이 어디인지조차 흐릿해지는 역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부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다수의 필진이 참여할 때는 늘 그렇듯 글과 글 사이의 편차가 느껴지는 경우가 있고,―앞에서 여러 번 지적했지만―‘입문서’에는 걸맞지 않은 어려운 논의가 가끔 등장하는 일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는 점을 여기에 적어두기로 한다. 나뿐만 아니라 제10판을 준비하고 있는 독일의 엮은이들도 이 점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신판을 기획하고 있다. 이 비판적 언급은 당연히 이 책이 현대적 고전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흠집도 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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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번역한 법철학 관련 책 가운데 가장 두툼하다. 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면식이 있고, 특히 엮은이들과는 오래전부터 친교를 맺고 있다. 스승 노이만 교수, 친구인 잘리거 교수가 이 책의 번역에 보여준 관심에 당연히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후기를 쓰면서 떠오르는 엮은이는 빈프리드 하세머 교수이다. 그의 열린 사고와 이 사고의 실천은 늘 기억에 남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사람 보는 눈’은 학문적 통찰력과 일상 사이의 친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내 머리에 깊이 박혀 있다. 하세머 교수의 너무나도 이른 죽음을 생각하면서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추모의 마음을 기록해두고 싶다.
번역 초고를 작년 이맘때쯤 완성했는데, 뜻하지 않은 병마가 찾아와 예정보다 출간이 많이 늦어지고 말았다. 조금 더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만 있을 뿐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나마 제자들이 꼼꼼하게 교정해주지 않았다면 이 정도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양의 초고를 읽어준 강영선 씨, 박석훈 씨, 한혜윤 씨에게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끝으로 심재우 선생님의 학문적 유산을 기리는 「몽록 법철학 총서」의 제9권으로 이 책이 출간되는 기쁨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우리를 떠나시고 5주기가 되는 마당에 변변한 행사 하나 없이 이 책으로 갈음하기에 송구하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그저 선생님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총서의 발전에 온 정성을 다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따름이다.
2024년 여름
옮긴이
윤 재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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