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목원대학교 교양교육원 송석랑 교수의『현상학: 시적 감각의 지성』. 이 책은 현상학과 예술의 관계를 지성과 감각의 연관성을 통해, 혹은 현상학의 지성적 논리와 예술작품의 감각적 논리 사이의 내적 유기성을 통해 규명한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막연히 다루어졌던 현상학과 예술작품 사이의 동근원성을 구체의 작품을 통해 보다 명확히 제시하였다.
출판사 서평
이 책은 현상학과 예술의 관계를 지성과 감각의 연관성을 통해, 혹은 현상학의 지성적 논리와 예술작품의 감각적 논리 사이의 내적 유기성을 통해 규명한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막연히 다루어졌던 현상학과 예술작품 사이의 동근원성이 한 자리에서 구체의 작품들을 통해 보다 명확히 제시된 이 책에는 시와 회화와 소설에 내재한 철학의 침묵을 깨뜨리는 독해의 사건이 있다.
현대의 철학에서 미학은 철학의 한 분과가 아니라 심장이다. 이는 미의 문제가 진리의 외부 혹은 주변에서 중심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을 뜻한다. 철학의 쪽에서 보자면 자신의 시적 본질을 회복한 사태가, 그리고 예술의 쪽에서 보자면 자신의 철학적 본질을 회복한 사태가 될 이 이행의 기미는 따지고 보면 니체 이후 비합리주의의 통찰에 있었지만. 미학주의의 장애를 돌파하며 감각과 지성 사이의 균열을 봉합, ‘철학 같은 미학’ 혹은 ‘미학 같은 철학’의 수준에서 예술과 진리, 그리고 감각과 지성을 아우른 것은 후설에서 비롯한 현상학의 논리였다.
머리말
현대의 철학에서 예술론 내지 미학은 철학의 한 분과가 아니라 심장이다. 이는 미의 문제가 진리의 외부 혹은 주변에서 중심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을 뜻한다. 철학의 쪽에서 보자면 자신의 시적 본질을 회복한 사태가, 그리고 예술의 쪽에서 보자면 자신의 철학적 본질을 회복한 사태가 될 이 이행의 기미는 따지고 보면 니체 이후 비합리주의의 통찰에 있었지만, 미학주의의 장애를 돌파하며 감각과 지성 사이의 균열을 봉합, ‘철학 같은 미학’ 혹은 ‘미학 같은 철학’의 수준에서 예술과 진리, 그리고 감각과 지성을 아우른 것은 후설에서 비롯한 현상학의 논리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 해명’ 측면에서의 철학의 우위와 ‘발생학적 기원’ 측면에서의 시의 우위 사이를 비집고 나올 동일성과 차이성의 문제에 대한, 다시 말해 ‘다르면서 같고 같으면서 다른’ 혹은 ‘서로를 서로로서 지시하면서도 고유성을 놓지 않는’ 예술 내지 ‘회화를 비롯한 넓은 의미에서의 시’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여러 차원의 해명을 요구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긴한 것은 그 둘의 표현 방식들에 반영된 ‘차이성’과 ‘동일성’이다. 가령, 철학이 <“세계의 ‘진리’는 어떤 외딴 곳에 고립되어 있는 것, 즉 실재론에서 말하는 세계나, 관념론의 절대정신에 내재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세계는 순수한 존재가 아니라 ‘나’의 숱한 경험들이 교차하고, 또 그것들이 ‘타자’의 경험들과 만나 서로의 얽힘이 중층을 형성하는 곳에서 돋아나는 ‘의미’(le sens)체이기 때문이다.”[메를로-퐁티] >라고 쓰거나, 또는 <“세계의 진리는 어떤 면에서 일상에 사용되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이 거기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거리를 둘 수도,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꿰뚫어볼 수도 없을 정도로 진리는 ‘나’의 곁에 가까이 있다. 따라서 진리의 본질을 알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진리의 그러한 모든 자명함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물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물러나 진리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볼 때, […]그것은 ‘우리’ 모두의 실존에 주어지는 존재의 의미다”[하이데거] >라고 쓰면서 직접적으로 ‘진리’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관념을 진술할 때, 예술은 그 진리에 대해 예컨대 우리의 시인(詩人) 이정록이 시 ?머리맡에 대하여?에서 그러했듯이 그저 ‘나’의 “머리맡” 삶의 일상으로 스며들어 우리에게 <“내 머리맡”에 있던 ‘당신’이 “당신의 머리맡”에 있던 ‘나’를 거처 “누군가의 머리맡”으로 확장해이 책은 현상학과 예술의 관계를 지성과 감각의 연관성을 통해, 혹은 현상학의 지성적 논리와 예술작품의 감각적 논리 사이의 내적 유기성을 통해 규명한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막연히 다루어졌던 현상학과 예술작품 사이의 동근원성이 한 자리에서 구체의 작품들을 통해 보다 명확히 제시된 이 책에는 시와 회화와 소설에 내재한 철학의 침묵을 깨뜨리는 독해의 사건이 있다.
현대의 철학에서 미학은 철학의 한 분과가 아니라 심장이다. 이는 미의 문제가 진리의 외부 혹은 주변에서 중심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을 뜻한다. 가는 시간>의 의미와 같은 것이 거기에 있었음을 보여주기만 해도, 그 진리에 대한 시의 표명과 무관히, 충분하였다.
예술은 ‘철학적 관념’의 명제들 내지 철학의 진리를 간접적으로, 아니 더 적확히 표현하자면 ‘침묵’으로써 진술한다. 예술에도 물론 ‘직접적인 진술’-만일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주제의 언급’-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예술의 진술은, 예컨대 그 진술이 시 ?머리맡에 대하여?의 <“진리는 내 머리 속이 아니라/ 내 머리맡에 있던 따뜻한 손길과 목소리”>라 하더라도, 그 침묵의 진술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술 본연의 진술은 분명 명시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명시적인 철학의 진술이 가리키는 ‘의미’를 현존시켜 보여준다는 점에서, ‘철학과 다르지만 같게’ 혹은 ‘같지만 다르게’ 세계의 진실을 담아낸다. 이 진실은 종래의 ‘철학적인 예술’의 그것보다 세계의 본령에 더 가까이 다가선 것이겠지만, 단 하나의 예술작품이나 단 하나의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문제는 그것의 이질성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철학의 시적 본질에 닿아있지 않은 예술, 달리 말하자면 철학적 본질과 단절한 예술은 없다. 그것을 부인하는 철학이 있거나, 아니면 시적 본질을 망각한 철학에게 복무하는, 그래서 자신의 철학적 본질을 겨우 흔적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던 수준에서 성립한 철학적인 예술이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철학처럼 명시적이진 않지만 철학보다 더 직접적으로 ‘철학의 시적 본질’의 차원에서 세계의 진실을 ‘시[예술]의 철학적 본질’로써 이야기하고 있는 문학(시와 소설)과 회화의 미적 인식의 내용과 이 내용의 이질성에 대해 기왕에 썼던 나름의 현상학적 해석들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특히 1장 <현상학과 진리의 미학>과 8장 <소설의 철학적 진실들>을 비롯한 글들의 많은 부분이 재구성되고 제목과 내용 또한 적지 않게 변경 되거나 ‘첨가/수정’되었다. 가능한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러한 것인데, 그러나 각주의 서지사항과 약기의 체계는 통일하지 않았다. 각 장의 글들에 참고 된 책들을 뒤에 장별로 묶어 정리한 마당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지사항을 확인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필자가 읽은 몇몇의 우리 시인과 작가, 그들의 시와 소설들에 대한 필자의 논의와, 주로 세잔과 고흐의 미술작품에 대한 특정의 현상학자들의, 특히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의, 논의들에 대한 재(再)논의들로 구성된 이 책의 해석들은 해당 작품들을 현상학의 존재론적 논리로 수렴한다는 점에서 형식과 내용에 대한 비평적 차이를 사상(捨象)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하이데거가 게오르게의 시 ?말?(Das Wort) 을 자신의 자리에서 읽었을 때 받았던 비난, 즉 “그 시에 대한 읽기는 하이데거가 자신의 언어철학을 되풀이해 설명할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 시를 임의로 끌어온 것”이라는 비난에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읽기가 “비록 시(?말?)와 자신의 입장 사이에 놓인 유사점들에 주목하면서 논의를 펼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시 해석의 첫 발자국을 의미할 뿐이며, 궁극적으로 이 해석은 시인과 사유가 사이의 대화를 겨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해석들 역시 다소 스스러운 감이 들지만 시를[나아가 예술작품을] 하나의 철학 논리로 재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새 비평적 차이를 초래할 근원의 차원에서의 대화를 지향하고 있다.
현대의 철학은 종종 예술작품의 의미로써 진리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설명’하거나 ‘예시’하려 든다. 그 견해와 논리에 무리가 없는 한, 시나 소설 혹은 회화가 갖는 인식의 구체성에 기대 철학이 자신의 내용을 전달하려는 것이니 책잡힐 일은 아니다. 또, 예술작품들 쪽에서 보면 자신들의 철학적 관념을 내주는 것이 될 그 일이 <예술과 철학의 대화>를 이르는 것이라면, 시가 시로서, 소설이 소설로서, 회화가 회화로서 취급되지 않는다고 불평할 이유도 없다. 이 경우, 문제는 그것들 밖에서 이미 확립된 철학적 관념을 일방적 또는 자의적으로 투입하여 시적 감각을 한정하거나 교살하려드는 해석의 태도에 있다. 이 새삼스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단 ‘감각을 통제하는 지성’ 위에 건축된 옛 철학들뿐 아니라 심지어 ‘감각에 뿌리내린 지성’ 위에 건축된 현대의 철학들을 위해 이야기되는 예술론에서조차, 그리고 예술작품들을 위해 철학의 담론들이 동원되는 비평의 현장에서까지, 그러한 태도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빠져있는 풍경을 목도한다. 일방적이고 자의적으로 철학의 관념을 들이대는 해석의 태도는 우선은 시적 감각을 억압하고, 결국은 예술작품 읽기를 통한 철학의 확장을 방해한다. 이 나쁜 귀결의 반복을 차단할 이론적 방도는 예술작품들에 대한 철학적 해석의 오류 내지 과잉의 사례를 일일이 호출하여 논파하거나, 아니면 예술과 철학의 대화원론을 환기하는 것, 그 두 가지일 것이다. 이 책의 해석들은, 전자에 비해 소극적이지만 사실은 전자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보다 일차적인, 후자에 걸려 있다. 언젠가는 출판될 것들이었지만, 필자의 게으름으로 서랍에 흩어져 박혀있던 원고들이 생각보다 빨리 이처럼 깔끔히 책으로 묶인 것은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철학과 박치완 교수님의 주선과 출판부 탁경구 팀장님의 세심한 배려 때문이었다. 감사드린다.
2012년 9월
송석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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