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제9판 머리말
각칙 구성요건은 형사실무에서나 사례문제의 해결과정에서 행위자 행위의 범죄성립요건 충족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종착점이자 ‘출발점’이다. 고의범이나 과실범, 작위범이나 부작위범 또는 미수책임이나 예비․음모죄의 죄책을 지울 경우, 그리고 심지어 공동정범, 간접정범이나 교사범 또는 방조범등 가담형태를 결정하는 일도 각칙 구성요건, 그 중에 특히 구성요건의 행위 표지에 대한 해석론에서 출발한다(총론에서는 각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다양한 개별 행위들의 공통된 전제조건을 ‘행위귀속’의 표지라는 이름하에 취급하였다).
형법각론에서는 구체적 사례가 발생할 경우 행위자의 행위가 어느 각칙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1차적 정보로서 각칙의 개별 ‘구성요건적 행위’를 위시한 특별한 표지들에 대한 판례법리 및 그에 대한 보충 또는 대안적 해석론에 관한 정보를 체계화하여 제공한다. 그런데 각칙 구성요건의 해석론은 실제 형사사건에 선제적으로 접근하고 해결해야 할 형사실무가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왔고, 형법이론학은 대법원의 판례 법리를 추수(追隨)하여 이를 정리하거나 이견을 제시하는 역할 등에 그치고 있다. 형법각론에서 학설보다는 대법원 판례 법리 및 판례사안 등의 소개와 분석에 더 많은 지면이 할애되고 있음도 이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에 나타난 각칙 규정에 대한 해석 방법에서 엿보이는 최근의 경향성 내지 특징점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호법익을 기준으로 삼은 목적론적 해석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예, 주거침입죄의 침입개념). 둘째, 사회전반에 걸쳐 피해자의 관점이 중요하게 부상함에 따라 종래 성범죄 구성요건에 의해 보호하는 법익인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민감도가 높아졌고, 그 결과 가벌성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법리 변경이 이루어지고 있다(예, 강간죄의 객체, 위계에 의한 간음에 위계, 강제추행죄의 폭행 협박 등). 셋째, 민사책임과 형사책임을 구별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체계론적 해석에 근거하여 과거 재산범죄 영역에서 형벌권의 부과대상이 되었던 사례유형들을 민사책임의 영역으로 전환하는 섬세한 법리들이 다수의 판례변경을 이끌어내고 있다(예, 배임죄의 타인사무처리자). 넷째, 법익보호를 위해 자유를 제한하는 형법의 작동방식을 자유이념에 기초한 헌법정신에 충실하도록 하는 차원에서 헌법의 기본권 정향적 해석방법의 약진 현상이 점진적으로 확장일로에 있다(업무방해죄의 ‘위력’, 일반교통방해죄의 ‘방해’, 병역기피죄의 ‘정당한 사유’ 등).
각칙 구성요건에 대한 대법원의 해석경향을 총체적으로 판단하여 일의적으로 결론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법원의 도그마틱에서도 기본적으로는―총론에서 강조하였듯이―법발견 방법적 측면에서는 ‘연역적-귀납적 혼합적 법발견방법(후성법학적 법발견 방법)에 따르고 있고, 개념 접근법에서는 자연주의적 존재론적 접근법에서 ‘규범적 평가적 접근법’에로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대법원의 해석론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의 해석 태도 중에 구성요건 별로 여전히 기계론적 개념법학적 도그마틱이나 연역추론적 삼단논법에 따른 해석에 집착하고 있는 경우도 엿보인다(예,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등 죄의 ‘위력’, 직권남용죄의 ‘남용’). 무엇보다도 각칙규정에 대한 해석공식의 내용에 ‘사회상규나 조리, 신의성실’ 등 고도로 추상적 불확정 개념을 포함시키고 있어 해석의 구체화 요구라는 헌법적 요구에 미달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예, 사기죄의 ‘기망’, 배임죄의 ‘임무위배’, 횡령죄의 ‘보관’, 배임수증재죄의 ‘부정청탁’ 등).
각칙 구성요건의 해석론의 다양한 분야들 중에 형사실무는 물론이고 형법이론학의 적극적 손길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문제영역도 있다. 각칙 구성요건의 해석과 형벌이론과의 관계문제도 그 중에 하나로 꼽을 수 있지만, 실무적 차원에서 보다 중요한 실익을 가진 문제영역이 있다. 각칙 구성요건의 다양한 분류법이 그것이다. 각칙 구성요건의 분류문제는 형법각론에서 형법총론의 범죄이론(및 그 범죄체계론)과 같은 거시적 이론체계에 비견할 만한 체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각칙 구성요건의 분류의 문제에 대한 소홀함을 보충하기 위해 본서 제8판에서부터 이 이슈를 ‘각론의 총론’이라는 제목 하에 취급하기 시작했고, 제9판에서는 이 분류의 문제를 좀 더 중요하게 다루기를 시도해 보았다. 내놓을 만한 가시적 성과는 없지만, 적어도 문제제기 또는 장차 다루어야 할 이슈들에 대한 관심도를 제기하는 수준의 기여는 했기를 바랄 뿐이다.
이번 여름 무더위를 겪으면서 ‘안정된 기후에서 살 권리’가 형법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법익으로 취급되어 형법각칙 구성요건에 편입되는 시기가 목전에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미 쟁점화되고 있는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한 신종범죄들에 관한 구성요건도 신설되거나 보완적으로 정비될 경우 형법의 해석과제는 점점 늘어나고 까다로워질 전망이다. 형법의 해석과 적용과정 속에서 누군가가 원하는 결론을 내기 위해 단편적 법적 지식들을 이리저리 짜 맞춰 가는 것은 ‘법기술자’의 일이지, ‘선과 형평의 아티스트’(키케로)의 일이 아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사례를 매끄럽고 무리없이 처리할 수 있게 되는 유능함은 법조‘경력’만 높일 뿐, 박학다식한 법적 지식과 사실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창조적으로 법(법리)을 발견하는 ‘법전문가’로서의 능력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형법각론 속에 소개된 다양한 해석태도들을 통해서 ‘올바른 하나의 해석은 없다’는 점을 알아갔으면 한다. 과거의 사례에 대해 경험적 법지식인 판례 법리에 대한 맹목적 암기에 만족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법원이 구체적 사례에 맞추어 발견한 고정된 법(법리=해석공식)의 계속․반복적 적용에 대해 수동적 자세를 취하기 보다는 과거의 사례와 새로운 사례를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안의 본질에 접근함으로써 법적용상의 평등원칙이 방법적으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적극적 법조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더 나아가 사례와 규범의 상호작용을 통한 가소성 있는 법을 발견하는 법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해 구체적 사건속의 사실관계의 굴곡진 모습과 그 사회적 의미차원에 접근할 수 있는 섬세한 감수성과 형법체계의 부분과 전체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비판적 능력을 키워감으로써 장차 ‘법의 문을 여는 열쇠’(이에 관해서는 총론 머리말 참조)를 가지게 되기를….
2024년 여름 끝자락에서 가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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